대한민국 최초, 대통령연대기 출간

시사칼럼
대한민국 최초, 대통령연대기 출간
  • 입력 : 2022. 07.18(월) 15:37
  • 뉴스핑
김대중연대기
[뉴스핑/뉴스핑]
정진백 김대중추모사업회장

많은 학자와 연구자들은 연구물/논문, 자전적 이야기, 시평/세상만평 등을 담은 책들을 많이 출간한다. 이들 책에 대한 서평書評 쓰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개인연대기에 대한 서평은 쉽지가 않다. 역사기록은 글쓴이의 사관史觀에 따라 역사 사실歷史事實이 재조명이 된다. 그렇지만 연대기는 성질상 역사 사실을 사실화하는 작업이 아니다. 기록자/편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있었던 사실’에서 필요한/중요한 사실만 취사선택하여 사실事實을 남기는 기록물이다. 지난해 정진백 김대중추모사업회장이 방대한 《김대중연대기》(총6권, 행동하는양심, 2021)를 내놓았다. 김대중의 삶을 추적하고 그의 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어왔던 어느 대통령에 대하여서도 연대기를 출간하여 그분 삶의 행적과 언행을 통한 사상을 담은 책이 나온 적은 없다. 연대기도 일종의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평史評 형식으로 서평을 쓰기로 한다.

김대중연대기 제1권(1979~1980)은 주로 대한민국의 ‘10.26유고사태’와 김재규의 재판과정에 대하여 많은 자료들을 담고 있다. 이 기록들은 10.26유고사태를 기회로 전두환이 공안公安권력을 모두 장악해 가면서 대한민국의 권력을 약탈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김대중연대기는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독일언론이 쓴 〈한국현대사〉와 주한미대사관이 본국에 보내는 〈기밀문서〉 등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볼 때, 10.26 박정희 격살 사건이 대한민국 권력 내부의 작은 우연의 모순들이 쌓여 표출된 필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드러내진 원인에 불과하다. 그 내면에는 박정희를 제거해야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있었다. 이를 입증해 주는 자료들을 기록해 놓았다. 박정희 죽음을 기회로 잡은 전두환은 군사재판을 통해 김재규를 사법살인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김대중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12.12역모사건(1979)과 5.17쿠데타(1980)다. 5.17군사반란 세력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엮어 체포한다. 이어 김대중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인격모독은 물론이고 사건 조작을 위한 고문폭력을 받는다(1980. 7. 11). 또 전두환은 자신의 권력 약탈의 앞길을 막는 민중항쟁 기의를 탄압하기 위하여 희생양으로 광주를 골랐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을 받은 공수부대는 광주로 들어와 마치 전쟁에서 적군을 토끼몰이하듯 옥죄어가면서 민중정치를 부르짖는 광주시민을 몰살하다시피 하였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왜 반미주의와 반미운동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들도 김대중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1) 당시 북조선군이 광주항쟁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2) 한미연합사령관(존 위컴)이 전두환의 ‘광주학살군’을 인가했다는 사실이다. 또 한국현대사는 광주학살에서 사상자는 1천 명이 넘을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김대중연대기에 기록된 내영들은 전두환이 얼마나 대한민국의 정의를 파괴했는지를 보여준다. 전두환의 삼청교육대에 대한 반인권적 내용이다. 박정희가 ‘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개척단)과 ‘국토건설단’이라는 이름으로 추악한 인권탄압을 하였듯이, 전두환도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탄압을 자행하였다. 독일언론의 한국현대사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인원을 대략 5만 7천명여 명으로 잡고 있다. 인권탄압에 대하여 김대중은 고문을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범죄”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문은 ‘악마의 기술’이라고도 표현하였다(1987.3.12.) 그래서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인권유린을 방지하기 위하여 인권위원회를 설치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대법원이 아닌 대법원儓法院은 김대중의 상고심을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한다.(1981.1.23) 그러자 전두환은 곧바로(1시간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김대중에 대한 사면 대가로 미국은 전두환에게 미국(대통령 레이건)방문의 은사를 내린다. 전두환이 미국의 백악관에 도착하자 재미한국인들은 전두환을 ‘민중살인마(mass enmurdere)라고 불렀다. 전두환은 미국에서 돌아와 1981년 5월에 극비리에 법관인사를 단행한다. 그리고 37명을 해임한다. 그 배경에는 〈김대중사건 재판기록〉이 일본언론에 전부 공개된 데에 대한 보복이었다.(1981.5.14. 한국현대사) 대한민국이 전두환 사유물이었다. 우리가 1981년 연대기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기록이 있다. 당시 북조선과 한국이 민족통일에 누가 더 관심도를 보였느냐의 문제다. 북조선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비하여 한국의 전두환은 관심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북측은 “평화통일을 위해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대체”, “군대 감축과 우리 땅의 비핵화”를 강조하고 있다.(1981. 11.3~6) 김대중연대기에 기록된 많은 자료들은 당시 남한의 반통일적 태도와 북조선의 적극적인 평화통일 노력을 대조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불 때, 오늘날 남측의 도덕적 주류/민족적 양심 세력들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 평화협정 체결, 무기 감축과 비핵화 주장이 진작부터 북조선과 해외동포를 중심으로 주장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반란군에 의해 옥살이를 당하고 있던 김대중은 1982년 말에 청주교도소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된다. 이어 정식 석방되면서(1982. 12.23)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연대기 1983년의 기록은 주로 김대중이 미국에 체류하면서 언론과 방송, 저명 인사들과 인터뷰한 자료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984년 연대기에서는 김대중이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자료들을 중요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김대중이 당시 슐츠 미국무장관에 보내는 서신에서 귀국에 대하여 안전과 위협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귀국을 해서라도 민중정치 추구에 노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김대중은 이어 전두환에게도 귀국하고자 한다는 서신을 보낸다.(9.11) 1985년이 되면 김대중의 본격적인 귀국 의지가 드러나고 미국이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하는 기록들이 나온다. 미국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시, 체포하지 못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였다. 그 대가로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88서울올림픽 유치 지원, 전두환의 4월(1985) 미국방문 허용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주었다. 김대중은 귀국 목적에 대하여 현 정국의 안정, 화해와 민주화, 한반도 평화적 통일에 기여함에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오래전 필리핀의 아키노가 미국에 망명을 하였다가 귀국하는 날, 마닐라공항에서 암살을 당하는 일과 같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많은 미국인(22명)과 수행원(38)이 동행하도록 하는” 경호조치를 취한다.(11.29)

김대중은 워싱턴을 출발하여(1985.2.6.) 일본의 나리타공항을 거쳐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2.8)하게 된다. 독일언론이 쓴 한국현대사를 보면, 김대중의 귀국 당시 상황과 정황들을 상세하고 보도하고 있다. 이 중 우리가 눈여겨볼 내용이 있다. “김대중이 귀국하는 날 서울에서 1980년 5월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전두환 퇴진 시위/기의가 일어났다는 점과 경찰 관계자에 의해 김대중 부부는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마포 자택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곧 감옥행 대신에 가택연금을 당했다.(1985.2.8.) “김대중이 집으로 가는 가두에는 2, 3만의 엄청난 지지자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가두에 있던 지지자들은 ‘김대중 민족의 구원자!’라고 외쳐댔다.

1986년에 들어오면 전두환 독재자는 내각책임제 개헌 음모를 꾸민다. 연대기 1987년 기록에는 김대중의 민주화 추진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이상한 징후를 담은 기록들이 자세하게 나열되어 있다.(1987.3.7.부터) 전두환 독재권력은 김대중에게 무기한 연금조치를 내린 다음(1987.4.10.) 현행헌법을 수호한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한다.(1987.4.13.) 이에 대하여 시민/대학생들의 엄청난 저항이 있게 된다. 시위를 막기 위해 전두환 독재는 악마도 상상하기 어려운 폭력을 휘둘러댄다. 그러나 성난 민중저항의 불길은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전두환 독재는 ‘대통령제와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을 하겠다는 내용의 6.29선언을 하게 된다. 13대 대통령을 뽑는 대선 일자(1987.12.16.)가 정해지면서 군사독재정권을 무너트리고 민중정치를 성취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재야 세력들이 〈후보단일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한다.(함석헌외 46인 서명, 1987.10.5.) 이에 김대중은 김영삼과 후보단일화 협상을 하였지만 실패한다.(1987.10.22.) 김대중, 노태우, 김영삼이 후보로 출마했다.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선거유세에 들어갔다. 대방동 보라매공원 유세 때는 250만이라는 청중이 모였다(1987.12.13.) 이 기록은 우리 정치역사에서 깨지지 않는 기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독재권력은 노태우의 당선을 만들어내기 위한 음모로 반인륜적인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 공중폭파와 함께 이를 북조선의 소행으로 조작한다.(1987.11.29.) 역시 북풍과 부정 투개표는 대한민국 선거에서 특효약이다. 여당의 노태우가 당선되고 김대중은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후 《김대중연대기》는 10년의 공백기(차후 나올 예정임)를 보내고 1997년부터 다시 시작한다. 1997년은 김대중이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한 자료들이 기록되어 있다. 김대중은 정당통합이 아닌 JDP연합을 이룬다.(1997. 11.3) 이로써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음해성 네거티브를 불식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대통령선거가 끝났다(12.18) 최종결과에서 선관위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발표한다. 김대중은 국정운영 방침으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동시 달성”이라는 국운부흥을 내걸었다. 그리고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고 간다.(1988. 2.20) 군부통치에서 최초로 민중정치를 일궈낸 김대중은 제2건국운동을 일으키고 남북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선언을 일구어낸다. 김대중은 이러한 대한민국에서 독재타도와 민중정치 달성, 냉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북조선과 평화협상 성취 등 노력 등이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2001.12.10.) 그럼에도 김대중의 노벨평화상을 폄하 내지는 헐뜯는 자들이 있다. 이는 크게 잘못이요 오해다.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추진은 김대중과 김대중 측근들이 한 것이 아니고, 이미 13년 전부터 독일사민당 의원들이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987.1.31.)

끝으로, 김대중의 옥중서신 내용 중에서는 우리 역사와 세계역사에 대한 역사철할적 인식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정치지도자의 정치철학이 모조리 담겼다. 옥중서신에서는 또 그리스와 근세의 세계 철학자들이 말한 정치관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면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다듬는 모습도 담겨 있다. 우리는 《김대중연대기》를 통하여 김대중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서량과 함께 세계 문호들도 따라가기 힘든 필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원고 없이 논리적으로 상황에 맞는 대중연설을 했다는 것은 김대중에게 천재 정치인이었다는 찬사를 보내기에는 표현할 말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2020. 7.15)

황보윤식 이력

1948년생, 문학박사(역사학, 사회경제사)
現, 함석헌학회 공동학회장,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1979년, 긴급조치 9호 위반 남한산성(육각)에서 김재규와 함께 1년여 옥살이
1981년,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대전감옥에서 3년여 옥살이
이후 한신대 연구교수를 거쳐, 한성대,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인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음.

개인저술
1. 《신채호의 민족주의와 역사철학적 인식》, 동연, 2021.
2.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안중근, 조봉암, 김대중, 함석헌의 평화사상》, 동연, 2021.
3. 《함석헌과 민본아나키스트, 그들의 역사적 기억》, 문사철, 2019.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민본주의 역사학자의 현대사 증언》,문사철 2017.
5. 《후광학 창시를 위한, 김대중 정치사상 체계의 거시적 분석》, 근간



뉴스핑 newsping@newsping.co.kr